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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2. 24. 19:56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웅장한 여객선 위에서 한 소년이 바다를 바라다본다. 무엇이 보이냐는 남자의 질문에 소년은 날치 떼가 보인다고 답한다.


아마 커다란 물고기에게 쫓기고 있는 것이겠지. 남자는 말한다. 찢어지는 고동 소리를 뒤로 하고 카메라는 배에서 점점 멀어지고, 무대는 바다 한 가운데로 옮겨간다.



 ‘깡’하는 곡괭이 소리와 함께 화면의 색이 돌아오고 시간은 멈춘다. 바다는 온통 투명한 에메랄드 빛이다. 힘차게 곡괭이질을 하는 노인과 그 곁을 지키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노인은 유리로 된 바다를 깨고 물고기를 꺼내 그물에 담는다.



하늘에 맺힌 날치를 거두며 바다를 거닐던 노인은 불룩 솟아난 물기둥을 발견한다. 노인은 가까이 다가가 물기둥에 오른다. 노인에게서 가벼운 탄성이 흘러나온다. 도약(跳躍)의 전조(前兆)다. 노인은 고래를 기다리며 밤을 준비한다.




1998년 선을 보인 타무라 시게루 감독의 작품 <고래의 도약>은, 고래가 바다 위로 뛰어 올라 다시 떨어지기까지의 찰나의 순간을 느린 시간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그려냅니다.


일생에 한 번 볼까말까한 자연의 예술을 보기 위해 모여든 구경꾼들, 고래의 도약을 화폭에 담는 화가, 그리고 그 속을 누비는 악단까지.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억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20여 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애니메이션은 많은 것들을 보여줍니다. 얼핏 보기엔 그저 이해하기 힘든 다른 세계의 이야기 같지만, 그 안에 녹여낸 의미는 뚜렷합니다. 흐르는 시간 속의 순간들, 다른 이들에겐 사소하지만 누군가에겐 중요할, 지나치는 찰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래 동화 작가이기도 한 타무라 시게루 감독은 특유의 동화 같은 상상력과 풍부한 색채를 필름에 옮겨, 단 세 편의 애니메이션 작품만을 만들었습니다. <고래의 도약>은 그 중 가장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 또한 완전한 우연이었습니다. 예전 애니메이션 채널들에서는 다들 잠든 한밤중이면 곧잘 자장가처럼 잔잔한 예술 애니메이션들을 틀어주곤 했습니다.



그 날 또한 열없이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다 만난 것이 타무라 시게루 감독의 <판타스마고리아> 였습니다. 잠결에 그 내용은 거의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그 작품이 보여준 색감과 독특한 연출은 뇌리에 강하게 남았습니다.


요즘처럼 온갖 다채로운 자극이 넘치는 시대에 이처럼 잔잔하고 일견 지루하기까지 한 작품들을 즐기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바쁜 일상에 정신 없이 챙기는 식사처럼, 문화 상품 또한 한 입에 털어 넣길 좋아하는 시대니까요.



하지만 가끔은 느긋하게 여유를 가지고 오래된 이야기들을 꺼내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20분의 짧은 상영시간이지만 그 안에는 셀 수 없이 긴 시간의 이야기가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적어도 유리 위를 걷는 그들에게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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